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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려줄게 있어… 해고당했어”/명예퇴직 당한 41세 대학 교수/목수 등 전전하다 페인트공 취직/1년반 실직기간 ‘절벽산책’ 비유「그날 밤 아내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손전등을 들고 방을 하나씩 돌아보면서, 혹시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는지, 또 처분한다면 얼마나 돈이 될는지 따져보았다.」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재산목록을 작성했던 사람은 미국 콜게이트대학 교수였던 돈 슈나이더. 그날 오후 해고를 통보받고 실업자 대열에 끼인 사람이다. 미국판 「고개숙인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절벽산책」(김정우 옮김·사람과 책)은 명퇴당한 중년의 좌절,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가장의 고통, 사회에 대한 분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흰 손」의 영문학 교수가 잡역 페인트공으로 전락한 논픽션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더해준다. 슈나이더는 태어날 아이까지 합해 4명의 자녀를 둔 41세의 대학교수. 93년 3월 해고된후 1년4개월간 무려 1백11개 대학에 지원서를 냈지만 모조리 거절당한다. 교수직을 포기하고 골프장 청소부로 취직, 마지막에는 시간당 15달러를 받는 목수가 된다. 1년반의 실직기간을 저자는 절벽산책에 비유한다.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스릴이 있을지 몰라도 본인에게는 생사를 건 외줄타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인기도 있었고 업적도 인정받았던 슈나이더를 해고시킨 「주범」은 미국에서 유행했던 다운사이징. 해고 다음날 아내를 졸라 스케이트를 타러간 그는 짐짓 아무 일도 아닌 것 처럼 『알려줄게 있어. 멋진 소식이야. 해고당했어』하고 말한다. 그가 생각한 최선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엄청난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부터 그는 실업의 의미를 뼛속깊이 느낀다. 실직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동료 교수가 라디오에 출연하자 4번이나 전화를 걸어 욕을 해대고, 난방용 연료대금을 받으러 온 수금원에게 괜한 트집을 잡고 신경질을 부린다. 끝내 그는 10여년만에 뉴욕타임스의 구직란을 뒤적거린다. 『대학에 있는 동안 바깥세상은 차곡차곡 교통정리가 되어 있었다. 한쪽은 컴퓨터 귀재들이, 다른 쪽은 영업사원과 간호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직을 하기 위한 마땅한 기술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 슈나이더 교수는 점점 불안해진다.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실직기간이 오래될수록 은행잔고와 함께 남자의 자존심도 줄어든다. 친구의 초대를 받고도 옷이 없어 『방금 정원을 손질하다가 왔거든』하고 낡아빠진 청바지를 입고 너스레를 떨고, 직업소개소 앞에서 줄을 설 때도 솔 벨로우의 소설을 옆구리에 낀다. 그 사이 아내의 뱃속에 든 다섯번째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키려고도 하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1천7백달러를 주어버린다. 자신이 선행에 대해 어떤 운명의 보상같은 것을 기대했다고 고백하지만 극한에 다다른 자의 심리가 엿보인다. 페인트공이 되던 날 그가 처음에 한 일은 아내가 모아둔 식량쿠폰을 꺼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불에 태운 것이었다. 마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듯이. 그는 이책에서 무엇보다 가족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특히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묵묵히 참아내는 슈나이더 부인에게서 미국 주부의 감춰진 미덕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행복하다. 일이 있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쁘게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손으로 가족이 살 집을 짓고 싶다.』 실직이란 절벽산책을 끝낸 페인트공 슈나이더의 작은 소망이다. 전직 영문학 교수의 소설같은 수기로, 내면심리 묘사와 수사도 돋보인다. | ||||
미국판 ‘고개숙인 아버지’ 그린 논픽션 「절벽산책」